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카모토 료마 (문단 편집) == 기타 == * 키 사진만 봐선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신장이 그 당시 일본인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182cm라는 수치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정확한 수치는 아니고, 당시 사람들 평균 키보다는 키가 컸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바로 윗누님인 오토메가 170cm(어떤 자료는 174)에 체중이 110kg이 넘는 당시 일본 여성의 평균 키를 훨씬 뛰어넘는 장신이라고 전해져서, 바로 밑 남동생 료마도 그 이상은 넘어서 적어도 173cm 이상은 될 거라고 대충 짐작한 키다. 그리고 182이라는 [[장신]]의 수치도 [[https://meiji-revolution.com/ryoma-height-13|주변인의 증언들이 각각 달라서]] 173 ~ 179cm 정도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료마가 실제로 180이 넘은 장신이었다면 당시 일본에서는 거인에 가까운 키라서 료마를 실제로 만난 사람들이 그 키를 언급했을 법도 한데 그런 기록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을 보면 그 정도로 키가 큰 장신은 아니었을거라고 본다. * 권총 료마의 권총은 처음에는 [[타카스기 신사쿠]]가 [[상하이]]에서 구매해서, 호신용으로 쓰라고 선물한 [[S&W M2]] 33구경이었다. [[테라다야 사건]] 때 그걸 잃어버리고 자비로 [[S&W M1]] 22구경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암살당할 때는 이 권총을 사용하지 못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reu.se.com/IMG_6077.jpg|width=100%]]}}}|| || [[S&W M1]] 22구경 || * 그 때문인지 [[검호#s-2]] 3에서는 남들은 검을 집에 넣으면 발도술을 쓰는 반면, 료마는 '''갑자기 [[권총]]을 꺼내들고 쏜다.''' 친구들과 대전할 때 쓰면 친구들을 벙찌게 만들고 [[리얼철권]]을 일으킬 수도 있다. 총 6발을 쏘는데 어지간한 검호들은 이 6발 이내로 제압이 된다. 그렇다고 좌우 이동으로 회피하려다가 넉백당하면 그 다음은 바로 달려가서 내려찍기로 끔살. 그러나 이보다 더 사기적인 올스텟 다 풀로 찍은 이쿠마츠 아줌씨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오히려 다 쏘고 나면 연속기 한 셋트에 바로 역관광)] * 검 료마는 평생에 3개의 검을 찼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 아들답게 성인식(15살 때)에 아버지가 선물한 짧은 칼([[와키자시]])부터 비싼 명검이었고, 그가 죽을 때 사용한 [[무츠노카미 요시유키]](陸奧守吉行)는 원래 사카모토가의 가보였는데 형이 그에게 주었다. 1866년 료마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 '무사가 [[대정봉환|큰일을 할 때]] 반드시 선조 전래의 갑옷이나 보도(寶刀)를 물려받는다고 하니 사카모토가의 가보를 보내달라' 부탁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서는 이 역할이 누이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료마가 암살당할 때 암살범의 칼을 막아낸 것도 이 칼이었다는 것이 근래의 연구로 밝혀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vQyUawNXM4Q&t=26s|관련 영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k-86-10.jpg|width=100%]]}}}|| || 료마의 검, 무츠노카미 요시유키 || * 검술 [[1853년]] 19살 때, 검술 수행을 위해 약 1년 동안 [[에도]]에서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유학해서 [[북진일도류]]의 검술과 나기나타 [[면허개전]]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북진일도류를 배웠는가 대해서는 훗날 역사학자 가운데 그 진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 기존에는 치바 사다키치에게서 받은 북진일도류 나기나타 병법의 목록(일본검술의 단수를 세는 단위 중의 하나)만 문서가 남아있었다. 사다키치는 북진일도류 개조 [[치바 슈사쿠]]의 동생. 사다키치의 딸이 치바 사나코인데 당대의 여성 검객이었다고 한다. 도장집 딸이라 어릴 적부터 문하생들과 어울렸다고. 료마와도 러브스토리가 있는데 평생 료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남은 목록 역시 북진일도류 중에서 가장 낮은 단수인 초목록(初目録)이었다. 북진일도류는 초목록, 중목록면허, 대목록개전의 3단 구도이며 소위 면허개전은 대목록개전에 해당한다. 때문에 검술에 대해서는 확증이 없었다. 그러다가 2015년에 료마의 유족들이 료마기념관에 기증한 문서들에서 료마가 북진일도류 검술의 면허개전과 나기나타 면허 개전을 받았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 검술에서는 주변의 인간관계 때문에 승급을 거부하거나 실제로는 실력이 안 되어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승급해주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단수가 높고 낮은 것이 실제의 검술실력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카모토 료마가 검객으로서 어느 정도의 기량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만한 자료는 없다. 행적을 보면 검객보다는 '[[논객]]'에 더 가까운 인물. 그런데 북진일도류의 치바 슈사쿠는 검술 실력 외의 조건으로 면허를 주던 당대의 관행에 반대하여 승단 체계를 따로 만들 정도로 실력을 우선시하던 검술가였다. 물론 암살과 검투가 횡행했던 막말 분위기 속에서 검으로 살생하지 않은 료마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서는 거의 무념무상으로 승부에 달관한 태도이지만 칼을 뽑으면 무적이라는 식으로 고수를 넘어서 달인에 가까운 검객으로 묘사한다. * 부츠 앵클부츠도 즐겨 신었는데 그 바람에 당시에는 드문 질병인 [[무좀]]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이것도 일본 최초급. 료마는 [[하카마]]에 [[부츠]]를 신는, [[다이쇼 시대]]를 상징하는 이른바 ''''하이카라''''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창시자이다. 최근에도 일본의 졸업식 등에서 자주 보이는 스타일이다. 이 문서 가장 위의 사진도 잘 보면 부츠를 신고 있다. 남성의 하카마+부츠 차림을 현재도 보통 료마님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좀 더 격식(?)을 갖춘 차림으로는 흰 차이나칼라 셔츠를 받쳐입고 기모노, 하카마와 부츠를 매치하는 복장으로 이 쪽은 다이쇼~[[메이지 시대|메이지]] 초기에 학생복으로 많이 착용하여 흔히 서생복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이 옷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로는 [[절망선생]]이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travelnews.co.jp/02-2.jpg|width=100%]]}}}|| || 료마의 부츠 || 료마가 부츠를 애용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토사 번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봉해 온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친 도쿠가와 세력과 기존의 토착 세력 향사(鄕士)의 200년 이상 이어진 대립으로 상급무사와 하급무사 사이에는 신분 차별이 당시 일본 어느 곳보다 심해서, 하급무사는 비가 와도 우산을 쓸 수 없고, 높은 [[게다]]도 신을 수 없었다. 토사 번에서 하급무사 계급이 결사 조직을 만들어서 에도 막부를 타도하려는(도막파) [[존황양이]]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료마는 카츠 카이슈가 보여 준 사진에서 미국 장군과 병사가 같은 군화를 신은 사진을 보고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짚신을 벗어던지고 부츠 애용자가 되었다. 그리고 실용성에서도 서양 해군은 이미 가죽 부츠(군화)가 필수 군수품이었다. 물기가 많은 갑판 위를 뛰어다니거나 밧줄을 밟고 돛대로 올라가야 할 때, 미끄러지고 벗겨지기 쉬운 [[짚신]]은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다. * 하카마 전통 [[하카마]]의 경우 칼같이 각이 잡힌 주름을 생명으로 여긴다. 남성 하카마는 전면에 다섯 갈래로 주름을 잡는데 각각 유교의 인 의 예 지 신을 상징한다고 하여 주름이 풀린 하카마는 굉장히 예의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주름을 잡기도, 풀어지지 않게 세탁하고 그것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아 굉장히 불편하다. 그리하여 이에 개의치 않고 아랫단 주름이 다 풀어진 하카마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 인물. 각이 풀린 하카마가 펄럭펄럭하며 부츠를 신은 발목 라인과 조화를 이뤄 굉장히 멋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패셔니스타]]. 이런저런 개인의 파격적인 행보와 삶으로 일본 근대사에서 [[자유인]]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인물. 정치적으로 대단한 행보는 [[삿초 동맹]]과 [[대정봉환]]뿐이다 이 두 가지가 당대 개화파 세력의 개혁 방침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이로 인해 [[일본]] 사회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으니, 료마의 역할은 컸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료마는 당대의 재야 인사들 중에서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기도 하여, 그가 사망한 후에도 료마의 후예를 자처한 정치인이 있었을 정도고, 삿쵸동맹도 그의 이러한 영향력 하에서 성립되었다.현대의 료마의 인기는 그런 정치적 업적이 아닌, 이러한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인간 사카모토 료마가 주는 매력에서 오는 바가 크다. * 누이와의 관계 병약했던 어머니는 료마가 11살 때 돌아가시고, 셋째 누나인 [[여장부#s-4.1|오토메(坂本乙女)]]가 엄마처럼 키우다시피 했다. 어릴 적 울보였던 료마가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울며 집에 돌아오면 '그러고도 사내대장부냐'며 혼쭐을 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이 차는 4살로 료마의 형제자매 중 료마와 가장 가까웠고 이 때문인지 료마의 가장 큰 이해자가 되주었다. 여담으로 오토메는 신장 174cm에 체중이 120kg인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굉장히 기골이 장대한 [[여장부]]였다. 료마는 생애 200여 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 중 누나 오토메에게 13통의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는 지금도 소중하게 보존되어 료마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다른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료마하면 떠오르는 자유로움과 달리 딱딱하고 예의 바르게 작성되어 있는데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들은 농담도 많고 자유로운 분위기(자신의 정치적 생각, 사담 등)의 편지를 남겼다. 특히 1864년 [[카츠 카이슈]]의 제자가 되었다며 자랑하는 편지에는 의성어로 '엣헴 엣헴(エヘン エヘン)'이라는 표현을 쓰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내색하지 않지만 고명한 선생님께 인정받았다는 기쁨을 누나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동생으로써의 귀여운 일면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통칭 '료마의 엣헴 편지'라고 불린다. 원문 번안: "지금은 일본 제1의 인물 카츠 린타로라는 사람의 제자가 돼서 일본을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다. 기뻐해 주길 바래." 일본을 이제 한번 세탁하고 싶다"는 유명한 말도 1863년 6월 29일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글귀였다. * 한국에서는 [[소프트뱅크]] 회장 [[손 마사요시|손정의]](孫正義)가 존경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소프트뱅크의 기업마크는 해원대와 형태가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